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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시간을 걷는 길, 2018 오래가게] 우리 떡을 알리려는 노력 - 경기떡집

By SeoulStoryMaster 2018-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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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추석 대목이라 밤을 꼬박 새우고 있어요." 명절을 앞두고 밀려드는 주문에 손길이 바빠집니다. 이제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시루떡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작업실 한 편에서는 하얗고 말랑말랑한 가래떡이 먹음직스럽게 뽑아져 나옵니다.  네 형제가 한 몸이 되어 가업을 이어나가는 경기떡집의 풍경입니다.



떡집이 가장 분주해지는 때는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입니다. 추석은 한해 농사를 끝내고 오곡을 수확하는 시기이기에 일 년 중 가장 풍성한 때인데요. 지난 노고를 위로하고 다 함께 결실을 기뻐하는 절기에 떡이 빠질 수는 없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주문량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지고 있어요. 가게 식구들이 모두 달려들어서 밤새 만들어도 힘에 부칠 지경입니다. 저희 형제가 모두 넷이고, 그중에 셋이 가게 운영을 도맡아 왔는데 이제는 둘째까지 합세해서 떡을 만들고 있어요. 서로 격려하면서 힘이 되어주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경기떡집의 맏형 최대로 씨(38세) 인터뷰 中)





대를 이은 명장의 가게
서울 3대 떡집 중의 하나인 '경기떡집'은 아버지에서 아들에게로 대를 이은 떡 명장(名匠)의 가게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업주 최길선 명장은 1960년대 서울 종로의 흥인제분소에서 떡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가게를 차리고 현재 망원동 자리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네 아들을 비롯한 가족의 힘으로 묵묵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떡집 5부자의 이야기는 2012년 인간극장에 방영되어 시청자들에게 훈훈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경기떡집을 두고 쏟아지는 미담(美談)의 중심에는 셋째 아들 최대한 명장(32세)이 있습니다. 사춘기 시절 좌충우돌 반항하던 대한 씨는 아버지의 지도로 떡 만들기에 입문, 매일 새벽 3,4시에 일어나 재료 선별부터 떡 제작까지 모든 과정을 배워나갔습니다. 친구들이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낼 때 '떡'을 외치며 인생의 출사표를 던진 셈인데요. 대한 씨는 입문한지 10년 만에 떡 명장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거머쥐며 전국 최연소 떡 명장(당시 25세)이 되었습니다. 명장이 되면서 대한 씨의 외길 떡 인생은 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최대한 명장과 형제들은 이후 떡 브랜드 '소담'을 오픈하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소담은 먹기 좋고 탐스럽다는 의미의 순우리말에서 따왔는데요. 소담의 떡들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 외국인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전통 떡의 세계화에 한걸음 나아갔습니다. 현재 소담의 브랜드 정신은 '경기떡집까페'로 이어져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습니다. 지난 9월 17일 남양주에 캐주얼 떡 까페 '경기떡집까페' 1호점이 오픈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는데요. 우리 떡이 현대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일상 속에 스며드는 모습을 기대해 봅니다. 





 우리 떡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 
떡집 운영은 무엇보다 강인한 체력을 요구합니다. 경기떡집 형제들이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평균 새벽 3시라고 하는데요. 하루 동안 판매할 떡을 만들고 나면 새로운 떡을 연구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좀 더 쉽고 편하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세상. 외길을 걸으며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떡에서 새로운 점을 발견할 때마다 재미를 느껴요. 올해로 17년 차 경력에 접어들었지만 '떡은 이런 것이다'라고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같은 종료의 떡이라도 색감과 질감이 모두 다르거든요. 떡을 만들면서 우리 떡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깨닫곤 합니다. 떡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없었다면 아마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최대한 명장(32세) 인터뷰 中)





경기떡집이 지금의 망원동 자리에 정착한지도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인근 지역민은 물론이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경기떡집의 떡과 인연을 맺었는데요.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 개업했을 시절에 방문하셨던 모녀 분이 계세요.
한동안 얼굴을 자주 보다가 십 년 가까이 소식을 알 수 없었는데요.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현재 미국에서 살고 계시고, 따님은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셨다고 하더군요. 딸이 살아생전 좋아했던 이티떡이 생각났다고 하셨어요. 어머니의 동생분께서도 몸이 좋지 않아 제주도에 요양 중이셨는데, 마찬가지로 저희 집 떡을 꼭 드시고 싶어 하신다는 사연이었어요. 당시 여러 사정이 겹치면서 동생(최대한 명장)이 직접 떡을 들고 제주도까지 갔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져요."
(경기떡집의 맏형 최대로 씨(38세) 인터뷰 中)




떡은 때때로 추억과 그리움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맛이 되는 것. 경기떡집의 떡이 오랫동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요. 경기떡집이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 있습니다. '정직(正直)'.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좋은 떡을 만들어내겠다는 마음입니다. 2008년 떡 재료의 가격이 폭등했을 때도 창업주 최길선 명장은 고가의 쌀과 국산 잡곡을 고집했습니다. 은행에서 5000만 원의 빚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떡은 재료의 질에서 성패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재료를 고수하는 것은 떡을 만드는 사람의 자존심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쌀을 사용해야 해요. 찹쌀처럼 찰기가 있어야 합니다. 묵은 쌀로 만든 떡은 식감부터 좋지 않아요. 제가 전국의 쌀을 돌아가며 사용하면서 연구를 해 봤는데 경기쌀이 가장 좋습니다. 본격적으로 떡을 만들 때에는 물의 양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어렵고 까다로운 부분이 바로 수분이에요. 말랑하면서 적당히 쫀득한 식감은 미묘한 수분감에서 비롯됩니다."

( 최대한 명장(32세) 인터뷰 中)







경기떡집의 내부는 유명세를 생각한다면 다소 소박합니다. 7평 남짓의 공간에 떡들이 진열되어 있고 한편에는 시식을 할 수 있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22년간 한결같았던 풍경이라고 하는데요. 가게 연차가 쌓이기도 전에 외관 시설부터 손보는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경기떡집의 전반적인 운영을 맡고 있는 최대로 씨는 경기떡집 고유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20년 전의 손님이 찾아와도 한결같은 가게의 모습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오래가게'라는 말에는 '오래된 가게'라는 뜻과 함께 '오래오래 번창하세요'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를 소중히 여기며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밝은 미래를 어렴풋 보게 됩니다. 경기떡집의 눈은 지역을 넘어 세계로 향하고 있습니다. 많은 외국인들이 경기떡집을 통해 우리 떡의 가치와 우수함을 알게 되는 날을 고대합니다. 아니, 그 날은 이미 저만치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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