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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세종)마을

By 이야기자료실 201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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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7년 준수방에서 세종이 태어나다 그래서 지금와서 西村이 세종마을이 되다

 

 

 

 

커다란 도트무늬 호박이 보인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

서촌길목 보물찾기 해설사의 젓 소개지

jean gallery

   

잠시 쉬어갈겸 가볍게 즐기기 좋은 겔러리

힐링스토리를 따라가 본다

   

 

사진 전문 갤러리 류가헌 바로 옆에 통의동 보안여관이 있답니다.

몇 십년 역사의 여관이었는데, 지금은 일종의 갤러리가..

예전에는 청와대 앞이라 保安이 중요했기 때문에

'보안'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지배적.

 

 

 

114紫橋교회

 

 

 

가우디를 뺨치는 건축작품

아는 것과 느끼는 것,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고,

그 중 정말 중요한 것은 느끼는 것이다

  

국립 맹학교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선희궁(宣禧宮)터의 모습입니다.

현재는 건물 1동이 옛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네요.

선희궁지는

조선 제21대 영조(17241776 재위)의 후궁이며

역사속에서 당쟁의 희생자로 그려지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 李氏, ?1764)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사묘(祠廟)인 선희궁(宣禧宮)이 있던 곳이다.

영빈 이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으며,

영조 6(1730) 영빈(暎嬪)에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아 4명의 옹주를 낳은 뒤 영조 11(1735) 왕자(뒤의 사도세자)를 출산하여 후사(後嗣)를 기다리던 영조를 크게 기쁘게 하였다.

영조 38(1762) 사도세자가 뒤주 속 굶어죽는 형벌을 받아 폐위 당하고 죽는 중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영조 40(1764)에 죽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하게 하였고,

다음해 7월에 시호(諡號)를 의열(義烈)이라 추존하였다.

아울러 북부 순화방(현재 신교동)에 묘를 세우고 묘호를 의열묘(義烈廟)라 하였으며,

정조 12(1788)에 선희(宣禧)라 고쳤다.

그 이후 선희궁이란 명칭이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때 묘()를 궁()으로도 승격하여 호칭한 것으로 추측된다.

후궁의 묘를 궁으로 호칭하는 경우는 극히 드믄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선희궁은 계속 존속되었으나 고종 7(1870)에 일시 육상궁(毓祥宮)에 옮겨 모시다가,

건양(建陽) 2(1897) 육상궁으로부터 다시 옛 궁으로 돌아왔다.

융희 2(1908)에는 다시 신위를 육상궁으로 옮기고

평락정에 봉안하였던 어진은 선원전(璿源殿)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영의정 등 정승만 여덟명을 배출했고, 백사 이항복 등 조선의 중추적 인물을 조상으로 두었던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던 우당 이회영 일가.

 

우당의 여섯 형제는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어찌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겠는가' 라는 결의로 전 재산을 처분하여

모든 일가가 만주로 행한다.

나라조차 잃은 상황에서 온 집안이 몰래 결행하는 망명길

만주에서 온갖 난관을 극복하며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착수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수 천의 독립운동가를 길러낸다.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 의열단,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관여하지 않은 곳이 없는 우당 이회영 일가의 역할

만석의 재산을 독립운동에 모두 쏟아 붇고, 정작 형제들은 곤궁함 속에서 독립운동을 해야만 했으니...

우당 이회영 선생은 일찌기 집중된 권력의 위험성을 깨닫고,

분권과 자치를 주장하며 독립운동사에...

 

국권 피탈로 망명했던 6형제 중 광복 후 살아서 조국땅을 밟은 이는

동생 이시영 하나 뿐이었다

   

 

 

 

재개발지역에서 남산타워가

   

 

 

水聲溪谷의 물줄기와 彰義門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에서 만나 開川으로 흐른다

   

 

중종과 치마바위(端敬王后 愼)

麒麟橋

   

 

 

남정 朴魯壽화백이 지난 봄 저 세상으로 가고 미술관으로 탈바꿈

잠간 好事를 누릴수 있는 기회를 갖다

   

門牌正門印象的이다

 

 

 

달과 소년

   

투명한 쪽빛과 과감한 구도, 그 속에 서있는 소년의 뒷모습, 여운을 진하게 남기는 그림입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세련된 색감을 선보였던 남정 박노수의 작품입니다.

박노수 화백은

1940년대 청전 이상범의 문하에서 사사했으며 해방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본격적인 작품 공부를 시작했다.

   

일제의 잔재와 영향이 팽배하던 해방 직후

한국화의 정체성을 모색하던 화단의 움직임 속에서 독자적인 화풍을 연구하고 시도했다.

평생에 걸쳐

오로지 작품 활동에만 전력을 다했으며

전통 속에서 현대성을 구현해 내

한국화단에 한 획을 그은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박노수 화백의 숨결이 살아있는

박노수 미술관에는

미술작품 뿐 아니라

조형미가 돋보이는 가옥과

다양한 수목,

작가가 직접 도안한 석물,

수집한 정원석 수석 등 다양한 볼거리도 만나볼 수 있다.

남정의 생가가 금년 봄 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단다

1930년대 근대건축가 박길용이 지은

한국식, 프랑스식, 일본식, 중국식이 혼합된 절충형 건물은

남정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동시에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입구에 걸린 편액 秋史글씨

如意輪(여의륜)

이 집에 들어있는 사람은 만사가 뜻대로 잘 돌아간다는 의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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