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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랑] 서울기행 (14) _ 마포구

By SeoulStoryMaster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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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는 정말 얘기할 게 많은 자치구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조건이 독특할 뿐 아니라, 그만큼 에피소드 또한 다양하게 품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한강 하구에서 55km, 서부 한강 연안에 위치한 마포는 서대문 안산(鞍山)에서 갈라진 와우산 구릉산맥, 노고산 구릉산맥 그리고 용산 구릉산맥이 한강으로 뻗어 한강을 호수처럼 가르고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서해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밀물 때 물이 역류해 강의 흐름이 멈추기 때문으로, 다른 유역에 비해 수심이 유난히 깊었다. 위로부터 용호(龍湖), 마호(麻湖), 서호(西湖)라 불렀으며, 삼개(3개의 포구라는 뜻)라 했다.
글 윤재석(언론인) 사진 나영완 일러스트레이터 문수민


마포라는 지명에 대해선 대략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우리말 ‘삼개’를 한자말로 바꿔 ‘마포(麻浦)’로 불렀다는 것. 물론 삼나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다른 하나는 삼개 중 지금의 마포가 마포강, 마포항 등으로 불려서 이 일대를 대표하는 지명이 됐다는 것. 마지막으로 마포의 본디말인 삼개는 원래 ‘섬개’였는데, 섬개는 ‘섬이 있는 갯벌’을 뜻한다는 것. 즉, 이 근처에 섬이 많아(노들섬, 너섬=여의도, 밤섬, 선유도 등)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천혜의 자연조건 덕분에 마포는 예부터 수상 교통의 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철로와 도로가 발달하기 전, 삼남 지방의 각종 물산을 한양으로 수송하는 물류의 대표가 조운(漕運)이었기 때문이다. 한강 상류로부터 강원도와 경기 동부 일원의 각종 농산물과 임산물이 실려 왔고, 하류를 통해 서·남해의 여러 항구에서 다양한 물산이 들어왔다.
특히 구한말 개항장으로 관문 역할을 함으로써 급속히 팽창했으며, 1866년 천주교도 박해 사건으로 프랑스 함대가 서강 하중동 앞까지 침투하는 등 열강 침탈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포는 국제항이기도 했다. 물산과 더불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고 시장이 형성되면서 대규모 어촌까지 조성되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와 개화기는 물론,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에도 한동안 서울을 먹여 살리는 주요한 통로였다. 하지만 철도 부설 이후 물화 집산 포구로서의 기능이 점차 줄어들었고, 한국전쟁 후 강화만이 막혀 한강으로 선박 출입이 금지되자 마포의 포구 문화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여담 하나 하자. 이처럼 북적이는 마포엔 별의별 인간이 다 꼬였다. 그중에서도 빠지면 서러운 게 이른바 왈짜패. 시장과 주막, 밥집 등을 무대로 패악을 일삼는 무리다. 이들의 행패 또한 오랜 세월 이어져 일제강점기엔 ‘용식이’라는 자가 마포를 쥐고 흔들었는데, 그가 당시 종로파를 이끌던 협객 김두한을 마포의 한 창고로 유인, 제압하려다 오히려 그 수하로 들어간 일화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예전엔 조운 요충, 요즘은 교통 요충
이렇듯 마포의 존재 의미가 아주 컸는데도 그에 걸맞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 이 일대는 조선전기, 한성부 관할 구역으로 성 밖 10리 이내에 있으면서도 독립 행정구역으로 승격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 두모방, 한강방, 둔지방, 용산방, 서강방 등 5개의 방(坊)이 한성부 행정구역으로 신규 설정됐지만 마포는 오히려 용산방과 서강방으로 갈라져버렸다. 급기야 한일병탄 직후인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가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예속시키면서 용산면과 서강면에 속하게 됐다. 이처럼 우여곡절을 겪은 마포는 1944년 서대문구와 용산구 일부를 분할받아 마침내 오늘날 마포구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예전 조운 위주의 물류 요충지이던 마포는 지금 도로와 지하철이 그물망처럼 얽힌 교통 요충지가 되었다. 강변북로가 구(區) 남단을 지나고 있으며, 마포로를 따라 지하철 5호선이 지나고, 구 중심을 6호선이, 서대문구와의 경계인 신촌로를 2호선이 각각 지나고 있다.
그럼 이제부터 마포 유람을 시작하는데, 아현동에서 출발하는 게 좋겠다. 서대문구 충정로3가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고개를 아현(阿峴) 또는 아현(兒峴)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애오개 또는 애우개로 부른다. 고개 모양이 엄마 등에 업힌 아이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 아이의 시체를 이 고개 너머에 묻게 해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실제로 아현동 산 7번지 일대엔 아기 무덤(兒塚)이 많았다고 한다.
애오개역을 나와 마포 쪽으로 향하면서 오른쪽을 쳐다보니 구릉이 온통 공사판이다. 이름 하여 ‘아현 뉴타운 건설 현장’. 예전 대표적 달동네이던 곳이다. 하지만 한 건설사가 시공하는 공사의 진척은 더디기만 하다. 경기 불황과 주택 경기 침체의 여파, 신축 아파트에 입주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한 원주민….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서울의 달동네 몇 곳은 그대로 두는 게 없는 사람들에게도 좋고, 문화 다양성 면에서도 훨씬 좋지 않을까….
풍성한 먹거리의 산실
이제 공덕동이다. 예전 경성감옥이 있던 서울서부지방법원과 검찰청을 지나면 공덕시장이다. 전형적인 전통시장인 이곳은 족발과 전으로 유명하다. 5호선 5번 출구로 나와 100여 미터가면 구수한 족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장충동 족발보다 훨씬 저렴해서 젊은 직장인이 많이 찾는다. 조금 더 가면 이번엔 전 부치는 냄새가 요란하다. 녹두전, 호박전, 생선전에 새우튀김, 오징어튀김까지. 이곳은 어르신들이 즐겨 찾는다.
이제 마포역 쪽으로 내려온다. 이곳에선 마포의 옛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다. 도화동과 용강동에 식당이 즐비하기 때문. 그중에서도 도화동 서울가든호텔 뒤엔 서민 식도락가들의 군침을 돌게 하는 곳이 두 곳 있다. 마포원조삼계탕과 마포숯불쭈꾸미로, 삼계탕집은 기실 옻닭으로 정평이 난 곳이다. 삼복 땐 오전 11시부터 식객이 모이기 시작해 정오가 되기 전 줄이 길 밖까지 길게 이어진다.
삼성아파트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곳은 원래 한국 최초의 단지형 현대식 아파트인 마포아파트가 있던 자리다. 예전 마포형무소 자리에 1962년(1차), 1964년(2차) 두 차례에 걸쳐 준공한 이 아파트는 당초 10층 규모의 Y자형으로, 수세식 화장실은 기본이고 중앙난방 시스템과 엘리베이터 등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설계했다. 하지만 초호화판이라는 여론에 밀려 층고도 6층으로 낮추고 엘리베이터와 중앙난방 시스템은 취소됐으며, 연탄 보일러로 대체됐다. 그럼에도 이 아파트는 변호사, 의사, 영화배우 등이 대거 입주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한동안 부유층이 등장하는 배경으로 단골 영화 촬영 장소가 되기도 했다.
전차 종점, 토정 집터 등 유서 깊은 곳 많아
발걸음을 남쪽으로 옮겨 불교방송 건물에 이르면 표지석 하나가 나타난다. ‘3·1독립운동 기념터 : 마포 전차 종점’.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마친 시위 군중이 저녁에 운집해 독립 만세를 외친 곳이자, 1968년 운행을 종료한 청량리-마포 간 전차의 종점이었다는 것. 하지만 실제 마포 종점은 그보다 남쪽인 한신오피스텔 앞이었다.
이제 마포를 건너 용강동으로 간다. 토정로를 따라 양쪽으로 식당이 즐비하다. 갈빗집, 주물럭집, 횟집, 대구탕집, 생태탕 집에 설렁탕집, 해장국집, 진짜 중국집(부영각), 심지어 양고깃집(양꼬치가 아님)까지 있다.
역사적으로 용강동에서 눈길을 끄는 곳은 조선 시대의 현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이 흙으로 정자를 짓고 살던 집터 (법정동으로는 토정동)와 서울시 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된 정구중(鄭求中) 가옥을 꼽을 수 있다. 토정로를 잠시 벗어나 마포래미안아파트 단지 사이에 끼어 있는 이 한옥은 구한말이 동네 부농 이 모 씨가 무남독녀에게 주기 위해 지은 것으로 나중에 정구중이 살았다. 서울에선 보기 드문 ㅁ자형 구조로 대지 241평에 안채, 별채, 창고 등이 배치돼 있다.
다시 토정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한다. 신석초교 사거리, 신수동 사거리, 하중동 사거리를 지나 7~8분 가면 강변에 고층 빌딩 몇 채가 나타난다. 이른바 강변 와인 바 촌이다. 와인 바를 나와 다시 서진해 상수동 사거리를 지나 당인동에 이르면, 허연 증기를 내뿜는 시설을 만난다. 국내 최초로 건설된 서울
시 유일의 서울화력발전소. 노래 ‘마포종점’ 2절 첫머리에도 등장하는(“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바로 그 발전소다. 원래는 발전소를 이전하고 그 자리에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 갤러리 같은 문화 공간을 만들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대체 부지를 찾지 못해 발전 시설을 지하로 옮기고, 지상을 문화 공간으로 개발하는 절충안을 최근 확정했다. 이에 따라 난방열 공급 규모도 지금의 2배인 10만 가구로 늘어나게 됐다.
지상 공간은 각종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문화 창작 발전소가 될 것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지하에선 전력 발전을, 지상에선 문화 발전을 하게 되니 어느 면에선 의미가 더할 것도 같다.
신앙 위해 몸 바친 이들의 성지
당인리발전소를 나와 또 서쪽으로 향한다. 한 10분 정도 가면 갑자기 숙연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대한민국 양대 종교(근본은 하나지만)의 성지이기 때문. 우선 깎아지른 절벽에 갓 모양의 성당(고 김수근 설계)으로 남은 절두산성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에 대적하기 위해 방어 기지로 사용하던 이곳은 대원군이 1만여 명의 가톨릭 신자를 붙잡아 처형한 곳이다.
절두산성지 옆은 양화진외국인묘원이다. 이곳엔 한국 개신교 역사의 굵직굵직한 페이지를 장식한 언더우드의 부인 호턴 여사와 아들 원한경(元漢慶) 박사 부부,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운 아펜젤러 2세 딸 A. 아펜젤러(이화여전 초대 교장) 등 500여 위의 외국인 선교사가 묻혀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쓰인 호머 베잘렐 헐버트의 묘비명을 보면 감동하지 않을수 없다. 합정동 로터리에서 자유로에 올라 200m쯤 가면 오른쪽에 고색창연한 정자가 하나 서 있다. 망원정(望遠亭)으로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1424년에 세운 정자다. 1425년(세종7년) 가뭄이 계속되자, 세종이 백성의 삶을 살피고 효령 형님을 위로하고자 정자를 찾았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니 매우 기뻐해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 지었다고 한다. 훗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소유하면서 망원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1989년에 복원했다. 이 정자는 여느 정자와 달리 규모가 상당하다. 웅장한 솟을대문으로 장식한 정문과 후문에 담장을 두르고, 정자 외에 별채도 있다. 지난해 6월 제1회 희우정 예술제가 열리기도 했다.
망원정을 지나 성산대교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거대한 구릉들이 나타난다. 바로 예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정비해 조성한 상암동 단지다. 이곳은 예전에 난(蘭)꽃과 영지(靈芝)가 자라던 섬이었으나 1977년 제방을 만든 후 서울의 쓰레기 매립장으로 이용하다가 1993년 2월 폐쇄하고 생태 공원으로 조성했다. 생태공원은 평화의 공원, 하늘공원, 노을공원 순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하늘공원 옆으로 난지천공원과 난지한강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통칭 월드컵공원이라 부른다.
이 공원은 서울 시민에겐 커다란 선물이다. 사시사철 다른 분위기와 모양으로 내방객에게 안식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봄에는 기화 묘초가 손짓하며 향기를 내뿜는가 하면, 여름엔 더위에 지친 이들에게 자연 속 잠자리를 제공하는 너른 품이다.
가을에는 하늘거리는 억새가 추억을 갈무리하게 하는가 하면, 겨울엔 먼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설경으로 시민의 정서를 어루만진다.
그 옆으로 생태 환경과 디지털 미디어 산업이 어우러진 미래형 복합 도시 ‘새천년 신도시’가 조성되고 있다. 영종도 신공항선과 경의선 등 광역 교통망이 지나는 요충지로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생태 도시, 첨단 디지털·미디어 기업이 집적된 정보 도시, 세계로 통하고 남북한을 잇는 관문 도시로 한 걸음한 걸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상암동DMC 한국영상자료원을 이따금 찾는다.
이곳에선 예전에 우리의 심금을 울린 방화(邦畵)는 물론, 외국 명작 영화, 심지어 지난해 관객 동원에 성공한 영화까지 다양한 작품을 상영한다. 지난 1월엔 작년에 개봉한 <건축학개론>과 <피에타>, 1970년대 히트작 <별들의 고향>과 <겨울여자>, 외국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미스트> 등을 상영했다. 때론 특정 감독이나 배우의 작품을 한 달동안 집중 상영하기도 한다. 이곳의 특징, 관람료가 없다는 것!

숨은 맛집 을밀대
이제 빠트리면 서운할 맛집 하나를 챙기러 간다.
합정동에서 봉화산 가는 지하철 6호선을 탄다. 대흥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와 서강대를 등지고 동쪽으로 향한다. 5분쯤 걸어 KT마포빌딩 골목으로 들어가면 맞은편에 을밀대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집은 평양냉면 전문집이다.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전 11시 10분만 되면 노동 남녀 가리지 않고 줄을 서 있다. 그런데 막상 냉면 맛은 별로다. 슴슴하고 밍밍하다. 그래서 이 집 다시 안 오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면 저 긴 대기 행렬은 무얼 말하는가? 바로 중독성이다.
적어도 세 번 정도 먹어봐야 진미를 알 수 있다. 나 역시 이 집단골이다. 그런데 절대 그냥 안 간다. 하루 전에 전화로 3호실(가장 오붓하다)을 예약하고 넷이서 간다. 가서 우선 녹두전과 수육을 시켜 소주 한잔 걸친 후 후식 겸해서 냉면을 시킨다. 이게 평양면옥(장충동), 필동면옥(필동), 을지면옥(을지로 3가), 평래옥(을지로 3가)과 함께 5대 평양냉면인 을밀대 냉면 먹는 법이다.
이제 마포 기행을 끝낼 시점이다. 을밀대를 나와 공덕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서울디자인고교(옛 동도공고)가 나온다. 이곳은 구한말 아소정(我笑亭)이 있던 자리다. 흥선(興宣) 대원군(大院君)의 별장으로, 아흔아홉 칸 집이었다. 아소정이란 이름은 흥선군 스스로 지었다. 흥선군은 마포에서 배를 타고 도망하려다 잡힌 후, 말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1989년 그가 별세하자 아소정에 묘소를 썼다.
하지만 대원군 묘도 아소정도 기구한 운명의 연속이다. 대원군 묘는 1907년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로 천봉(薦奉)됐다가, 1966년 미군 기지가 들어섬에 따라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장현리로 재천봉된다. 제국주의에 맞서 쇄국정책을 편권력자의 묘가 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밀려나는 아이러니라니. 아소정 역시 일부가 서대문구 봉원동 봉원사로 옮겨졌다가 소실됐다. 복원한 건물은 지금 이 사찰 염불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홍대 앞 ‘젊음의 해방구’
홍익대 부근은 한마디로 ‘젊음의 해방구’다. 이른바 ‘홍대 문화’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이 일대의 진화는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그 시발은 미대생들의 작업실 문화에서 비롯됐다. 미대생들이 홍대 근처 살림집에 있는 차고나 반지하방을 작업실로 빌려 그림 그리고, 술 마시고, 토론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가 태동한 것. 1990년대 중반 들어 록 카페도 생기면서 이곳이 더욱 북적대기 시작했다. 이런 토양을 바탕으로 1998년 8월 제1회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 열렸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프린지페스티벌을 모방한 이 행사는 인근 창작 공간을 무대로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과 행위를 일반에게 보여줌으로써 예술적 의미로서 ‘홍대 문화’를 육성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직후 생긴 ‘클럽데이’는 홍대 문화에 유희적 요소를 더했다. 매월 마지막 금요일 1만원짜리 티켓 한 장으로 일대의 여러 업소를 순회할 수 있는 이 행사는 젊은이들의 필수 코스였다. 클럽데이 참여자 중 각자 취향에 맞는 옷차림을 한 코스튬 플레이어가 거리를 활보하는 진풍경을 선사하면서 이 일대는 세계적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대기업 자본이 침투하면서 임대료가 터무니없이 올라갔고, 홍대 문화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많아졌다. 가장 타격을 입은 건 클럽데이. 2011년 초 주최 측은 ‘클럽데이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6개월 후 재개했지만 예전과 같지는 않다. 그래도 홍대 일대는 젊음의 거리다.
벼룩시장은 우리 젊은이들뿐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도 빈번히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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