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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스토리]②광화문 안경집 밑 세종 生家가 묻혀있다

By SeoulStoryMaster 201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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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광장 서편 두번째 이면도로인 새문안 3길∼자하문로 1.8km에 이르는 길은

초고층 주상복합건물, 오피스빌딩, 서울 경찰청 등 정부기관, 상가들이 빼곡히 차 있다.

이곳은 수십년동안 도심 재개발이 쉴새없이 진행돼 왔다.

최근 십여년 새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몰려들어 수많은 복합건물 개발로 떼돈을 벌어갔다.

그야말로 한탕주의가 만연한 개발 열풍의 진원지였다.


그러나 이곳이 '혁명의 성지'라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알고 싶어도 혁명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새문안 3길∼자하문로 1.8km.

점심 무렵 거리는 직장인들로 가득 차고 수만명의 유동인구로 북적이는 모습은

그저 현대 도시의 일반적인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15세기 이후 혁명이 발상해 여전히 진행중이다.

혁명이 언제 끝날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전인마답의 혁명은 그 짧은 길안에서 태어나고, 길러지고, 때로 숨죽이며 견뎌왔다.


바로 혁명은 한글로부터 사작됐다.







"한글은 창제만으로도 지배계급을 공포로 몰아넣은 대선언이자 혁명였다.

한글이 제대로 전해졌다면 조선은 더 진보ㆍ진화했을 것이며 인류문명 또한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21세기 최고의 지성으로 일컫는 촘스키는 "한글은 꿈의 환상적인 언어"라고 정의했다.



고은시인은 "한글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이라고 칭했다. 한글은 꿈의 언어며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김종택 한글학회장)


"지금 이 나라 지식계층은 영어에 대한 충정이 높다. 지위가 높을수록 더하다.

조선 5백년동안에 그랬던 것처럼 한글을 업신여긴다.

아직도 주야장창 영어나 한자공용을 부르짖으며 한글을 탄압하는 이들이 지도층에 수두룩하다.

세종이 꿈꿨던 혁명은 아직 미완이며 진행형이다.

한글은 인류 전체에 전해져야 한다.

인류가 자유롭게 소통하고, 정보로부터 소외받지 않는 것이 비로서 세종의 혁명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대로 한말글 문화협회장)



◇ 주시경 생가, 성지의 서글픈 흔적

지금 학문과 문화운동 양대축에서 한글을 견인하고 있는

두 사람이 '미완의 혁명'으로 칭한 것에 대해 세종은 어떻게 생각할까 ? 

불볕더위가 찌는 듯한 거리에서 혁명의 의미를 찾아 나섰다.

대우건설 본사 맞은 편 한글회관에서 자하문로쪽으로 500m 올라가면

'경희궁의 아침', '용비어천가'라는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이 새문안 3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서 있다.

최근에 부동산 개발 열풍을 타고 건립된 건물이다.

오피스텔도 수백여실 들어 있다.

요즘 한실 당 월세 100만원에 달해 웬만한 직장인들은 언감생심 군침만 흘리는 곳이다.

지난해까지 이 거리는 주시경길로 불렸다. 정부가 도로명주소를 추진하면서 최근 '새문안길'로 바꿨다.

바로 이곳에 주시경선생 집터가 있다.

집터는 용비어천가라는 주상복합건물이 깔고 앉아 흔적도 없다.

지난 2004년 개발 시행사가 건축허가를 받을 당시 종로구청의 권유로 작은 상징물 하나 세워놓았을 뿐이다.

그 상징물이라는게 대리석으로 된 반구형 분수대 행태로 주시경 혹은 한글과는 전혀 연관성을 느끼기 어렵다. 

주시경의 호 '한힌샘'을 형상화한 듯 바닥에 작은 원형 물길을 둘러놓은 정도다.

상징물이 놓인 자리는 새문안길에서 꺾여 들어간 건물 출입구 옆이다.

일부러 찾아가 보지 않으면 주시경 집터라는 걸 알기 어렵다.

생가 주소는 현재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 75번지로 돼 있다.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작은 아버지 민진의 양자로 입적돼 이곳에서 열두살부터 살았다.

서른 여덟 세상을 뜨기전까지 주시경은 한글 보급에 온 몸을 바쳤다.


"지금 우리나라의 한시동안은 남의 나라 하루동안보다 더 요긴하고 위급하오니,

그림(한문) 한가지 배우려고 이렇게 아깝고 급한 때를 허비하지 말고 우리를 위하야

큰 성인(세종대왕)께서 만드신 글자는 배우기가 쉽고 쓰기도 쉬우니

이 글자들로 모든 것을 기록하고 사람마다 젊었을 때에 여가를 얻어

실상 사업에 유익한 학문을 익혀 각기 할 만한 직업을 지켜서

우리나라 독립에 기둥과 주초가 되어....우리의 부강한 위엄과 문명한 명예가 세계에 빛나게 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897년 4월 24일자 독립신문 주시경의 '국문론')


이 글은 주시경이 한글을 '독립혁명의 도구'로 이해했음을 알게 한다.

시경은 1896년 5월 독립신문사에 '국문동식회'라는 국문연구단체를 만들고 국문법 연구를 시작했다.

1907년 주시경은 지석영과 함께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연구기관인 '국문연구소'를 열고 주임연구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서울 시내 18개 학교에서 주당 40여시간씩 국어강의를 병행했다.

이화학당, 흥화학교, 배재학당, 중앙학교, 휘문의숙 등은 물론

심지어는 여러 강습소를 열어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밤낮없이 한글을 가르쳤다.

주시경에겐 '주보통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강의 책을 보따리에 싸서 다니는 걸 보고 학생들이 지어부른 것이다.

이후 그의 제자들은 조선어학회를 이끌며 조선어사전 편찬사업 등을 전개하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사하거나 해방 이후 정부 수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선어학회는 분단으로 남북한이 갈라진 이후 남한 한글학회로, 북한은 조선어학회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출처: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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