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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을 사랑한, 살다간 작가들의 발자취와 함께... 제2부

By 이야기자료실 201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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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텔링 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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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역 쪽으로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효자베이커리가 있다

통인동 43-1, 옥인동 47번지로 가보자. 송석원이라는 표지판이다.

도로변 전봇대 옆에 그 흔적을 담고 있다.

 

 

 

 

송석원은 옥계시사의 맹주인 서당 훈장 천수경의 집이다.

천수경은 자를 군선(君善)이라 하였고, 집은 가난하나 독서를 즐겼으며 특히 시에 재주가 있었다.

옥류천 위에 초가집을 짓고 스스로 호를 지어 송석도인(松石道人)’이라고 하였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그 이름이 일송(一松), 이석(二石), 삼족(三足), 사과(四過), 오하(五何)였다.

 

()과 석()은 그가 사는 송석원에서 따온 것이고 족()은 셋이면 족하다는 뜻이며, ()는 넷은 너무 지나치다는 뜻이며, ()는 다섯이나 되니 어찌된 것이냐는 뜻이다.

그의 사람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얘기이다.

 

시사는 시를 짓는 동호인 모임으로, 옥계라는 이름은 옥인동을 흐르던 옥류동천 계곡에서 나왔다.

옥계시사는 정조 10년인 1786년 규장각 서리들을 중심으로 결성돼 30여년간 이어졌다.

 

송석원시사로도 불리는 옥계시사는 조선시대 웃대 중인 문화의 정점이다.

웃대는 청계천 위쪽 동네라는 뜻으로, 지금의 서촌이다.

웃대의 중인들은 역관, 의관, 율관, 음양관, 산관, 화원 등 요즘으로 치면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중인은 양반이 아니어서 고위 관직에 나갈 수는 없었지만,

전문 지식과 문화적 소양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들어 한양의 문화 리더로 떠오른다.

 

옥계시사의 아취는 매우 그윽했다.

동인 시집뿐 아니라 김홍도와 김인문의 그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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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원 시사 야연도다.

1791년 음력 6월 보름날의 야간 모임을 전하는 글을 보자.

 

나무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골짜기는 은은한 달빛에 정취가 그윽하다.

개울엔 아지랑이 홀연히 피어나 여름 밤의 흥취를 한껏 무르익게 한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개울을 건너 뜻이 맞는 아홉 사람이 옥계 옆에 모였다.

모인 자리에 촛불이 켜지고 아담한 술상이 들어온다.

모인 사람들은 가져온 좋은 술에 취하자 더러는 팔 괴고 눕기도 하고 더러는 술기운에 자갈 위를 비틀거린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고 둘러 앉아 흐뭇한 마음으로 옥계의 아름다움을 다투어 노래한다.”

 

잠시  저 자리에 나를 초대해본다. 입에 미소로 절로 감돈다.

 

옥계시사의 백일장은 누구나 참여하고 싶어 하는 대단한 자리였다.

하얀 종이를 펼치고 글재주를 겨룬다 해서

 백전(白戰)’이라 했던 이 행사는 매년 봄과 가을, 좋은 날을 잡아서 했는데,

수백 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고 최고의 문장가들이 심사를 맡아 재상들도 백전 심사를 영예로 알았다.

백전이 열릴 때면 전날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순라꾼은 한밤중에 돌아다니는 사람을 붙잡아도 백전에 간다고 하면 놓아줬다.

장원을 한 사람의 시축(시를 쓴 두루마리)은 그날로 한양 안에서 돌고 돌아 종이가 다 해져버린 뒤에야 주인에게 돌아올 만큼 인기였다.

 

당대 한양의 문화 중심으로서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 터, 암각화 송석원은 추사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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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 <송석원> 각자는 실제와 다르게 세로로 쓰여 있다.

 

사진: 1817, 추사 나이 32세에 송석원 시사(시회)의 부탁을 받아 썼다는 글씨다.

가로 크기가 1m 가 넘고 지금도 옥인동 어느 집 바위에 있는데,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추사 글씨를 논하면서,

추사가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글씨가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꺼운데다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고 논한 글씨가 바로 이 松石園석자라 한다.

 

추사하면 너무 높아 우러러보기에도 벅찬 그의 글씨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평가한 이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나는송석원 각자를 들여다 보며 연암의 마음을 읽어볼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해본다.

 

바로 이곳이 위항문학의 산실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위항이란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하고 세상을 뒤집어 보는 것이다.

비록 터만 남은 송석원이지만, 이런 정신은 서촌의 DNA가 되어 사람들 마음 안에 남아 있음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천수경의 집터 송석헌은 김수항, 민태호를 거쳐 윤덕영의 소유가 되었다.

그의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이들이 정신을 따라 길을 나서 보자.

 

톡톡 길바닥을 두드리는 흰지팡이를 지닌 장애우를 자주 만나게 되는 이 길이 참 평화롭다.

혼자 걷는 그들 모습 어디에도 결핍을 느낄 수 없다.

일반인과 장애우들이 공존하는 서촌의 한 모습이다.

엉컹크길을 따라가 보자.

옥인아파트 지나 9번 마을 버스 다니는 길에 옥인동 9번지가 있다.

 

소설가 김송의 집이다.

누상동 9번지라고도 하고, 현재는 옥인길 57, 154반이다.

윤동주 하숙집터다.

지금 그 집터엔 빌라가 지어져 있어 당시 하숙집이었던 한옥을 볼 수는 없다.

집 담에 윤동주 하숙집이었다는 안내글이 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모양이다.

그 앞에 서있는 전봇대가 그 시절 애기를 품고 있는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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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동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어름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이라 불리웠던, 그에 대한 생각이나 말을 하면 할수록 기분 좋아진다.

 

만주 용천에서 태어나 서촌으로 이사 온 까닭은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식사가 부실해졌기 때문이다.

서촌에서 사직단을 거쳐 금화산을 넘어가면 곧바로 연희전문학교여서 통학하기에 알맞은 거리였다.

 

옥인동 9번지 김송의 집에서 정병욱과 하숙을 한 기간은 19415월에서 9월까지다.

김송이 요시찰 인물이어서 일본경찰이 들락거리는 것이 불편해 두 사람은 북아현동으로 하숙집을 옮긴다.

짧은 기간의 하숙집이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곳이 그의 시 많은 부분이 잉태된 곳이기 때문이다. 동주가 쓴 하루 일과다.

 

아침 식사전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세수는 골짜기 아무데서나 할 수 있었다...,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후유노아도, 남풍작이란 음악 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보기도 했다...,

적선동 유길서점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그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걷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낀다.

그 바로 위가 수성동계곡이다.

저 길이 동주의 산책길이었을까?

 

윤동주는 졸업기념으로 첫시집을 내려했다.

시집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하고 이 시집에 서시를 쓴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지도교수 이양하는 시집출간을 반대했다.

그래서 3부를 작성해 1부는 지도교수 이양하에게 드리고, 한부는 정병욱, 그리고 한부는 자신이 가지고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1943년 구속되고, 19452월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살의 짧은 생을 마친다.

정병욱도 학병으로 징집되는데, 그때 그는 어머니에게 동주의 원고를 맡긴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항아리에 담아 마루 밑에 보관 했다.

살아 돌아온 정병욱이 윤동주 유고시집을 출간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이다.

윤동주에게 정병욱이 없었다면?

아들의 부탁에 지혜롭게 관리해준 어머니가 없었다면?

진정 아름다운 관계란 어떤 것인가를 내게 알려준 이들의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길 하나로 누상동과 옥인길이 갈라지는데,

당시 누상동엔 평범한 서민들이 주로 살았고,

옥인동 일대엔 권세를 가진 부자들과 일본인들이 주로 살았다고 한다.

 

누상동을 떠나 누하동으로 향합니다. 누하동33번지 대오서점이다.

 

주인할아버지와 할머니 가운데 자를 따서 대오서점이라 이름 붙이고,

60년동안 운영한 서점이다.

할아버지 먼저 보내고 자식들이 모시겠다고 해도 할머니는 책들과 여생을 보내는 것이 좋다며 서촌에 남으셨단다.

 

간판만 보아도 이미 살아있는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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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중고서점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했지만,

 케케묵은 먼지 쌓여있는 책들과

영화 상어촬영지 였다는 명성에 많은 사람들이 들리는 곳이다.

이젠 서점 자체 보다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공간이 되었다.

오래오래 한 가지 일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역사가 되는구나는 생각이 들어,

가게 가득 쌓인 책들에 자꾸만 눈길이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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