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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서울] 신촌의 피아노 - 사람

가브리엘 | 2016.05.20 19:09 | 조회 : 1639

서울살이 오 년치, 로 시작하는 한 노래가 있다. 서울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혼자 살아가는 아가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뮤지컬의 주제곡이다. 외국 생활도 오래 했고, 기숙사 고등학교를 다닌 데다가 대학 역시 서울에서 혼자 다닌 내가 객지 생활이 힘들고 외롭다, 고 말하면 가족들과 친구들은 위로 대신 콧방귀를 뀐다. 새삼스럽게 외로울 게 뭐 있겠냐, 하는 뜻이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그해 여름은 꽤 고달픈 계절이었다. 대학원을 중단하고 한 방송사에 들어갔지만 첫 직장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가족 없이 아프면 서럽다는 말도 톡톡히 알았고, 결국 여유 시간이 없는 방송사 생활을 오래 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남들은 다 좋다는 직장에서 왜 내가 더 버티지 못했을까 하는 자괴감, 그래도 더 이상 버티는 건 무리였다는 자기 위안, 학교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고민이 겹치고 겹쳐서 오히려 매일을 무기력하게 보냈다. 매일 오피스텔 침대에 누워 있다가 더위가 좀 가시는 오후가 되어서야 대학생 때에도 자주 들락거리던 책방에 가서 소설을 뒤적일 뿐이었다. 그러던 하루는 서점에서 책을 읽다 나오는데 평소에는 보기 힘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촌의 홍익서점 앞에는 늘 피아노가 놓여 있다. 나도 친구들도 몇 번 뚱땅거린 적이 있는, 신촌을 오가는 사람들에겐 익숙한 피아노지만 정작 오랜 시간동안 공들여 치는 사람은 없는 피아노이기도 하다. 남들 앞에서 부끄러워서, 자신감이 없어서 못 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은 정장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할아버지께서 피아노 앞에 앉아 계셨다. 음정 하나하나가 깨끗하고 청량하게 퍼져나갔고, 할아버지는 마치 아무도 주위에 없는 것처럼 단정한 동작으로 피아노를 연주하셨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십 분이나 시간이 지나 있었고, 그 피아노 건반을 신중하고도 쾌활하게 만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계속해서 기억에 남았다. 고민하는 사람도 방황하는 사람도 많을 대학가의 서점 앞에서 마치 서부 영화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피아노 소리로 모든 걸 날려버린 할아버지. 그 뒤로 서점을 드나들 때마다 피아노가 달리 보였고, 조금씩 생각이 밝아진 것도 같다. 어느덧 그도 몇 년 지난 일이 되었고 나는 또 새로운 직장에서 좌충우돌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신촌에 간다. 피아노 소리가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는 듯한 기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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